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 상륙작전 (문단 편집) ====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 상륙 ====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Inchon.png|width=100%]] || H-아워 8분 전에 미 해병대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 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다. 레드 비치의 상륙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 주정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구체화된 개념으로, 각 주정조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지휘를 받는 임무 지향적 조직이다. 중대 화기소대와 대대 돌격소대로부터 기관총과 3.5인치 바주카포, 화염방사기 등을 배속받아 화력을 보강하고, 주정조 단위로 싸우며 내륙으로 진격하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원 분대 및 소대로 복귀한다.]를 형성했다. 여기 탑승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익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익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다.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다. 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북한군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곧바로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고, 일부 병력은 해안 경비를 맡으며 후속 상륙 병력을 도왔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 첫 도입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먼저 썼다.]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미군은 인천항의 도크를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일사천리로 소탕해 나갔다. 그리고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다. 이어서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상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다. 작전의 총 지휘는 미 육군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병력의 총지휘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다.[* 홍은혜 여사의 회고집인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수록]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